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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왕들의 업적

조선 17세기 왕 광해군, 인조, 효종, 현종, 숙종의 업적

by 엔젤리아 2024. 7. 3.

1. 광해군(1608~1623)(북인):

광해군은 중립 외교 정책을 합니다. 후금(누르하치, 1616)이 명나라와 대립관계를 이루고, 명이 조선에게 파병요청을 합니다. 이때 조선은 후금에 강홍립을 파병하여 상황에 따라 대처하게 합니다. 즉, 대의명분보다 실리를 선택합니다.(중립외교)

 

1-1. 인조반정(1623)

 → 인조 즉위, 서인이 집권하게 됩니다. 광해군의 중립외교 정책에 대한 서인의 반발이 강했습니다.

광해군의 실정: 페모 살제(인목 대비를 폐위시키고, 영창 대군을 살해합니다.)

 

1-2. 전란을 수습

  양전사업, 토지대장, 호적(인구조사)을 실시합니다. 이는 세금이 상승하고, 개간을 장려합니다. 북인이 집권(대북)하면서, 회퇴변척소(조식을 높이고 이언적, 이황의 문묘종사를 반대합니다. 정인홍이 유적에서 삭제됩니다. → 실패(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의 5현 종사를 허용합니다.)

 

1-3. 대동법 실시: 

  대동법은 조선시대 세금제도입니다. 특산물 대신 쌀로 세금을 납부하는 제도로 이는 경기도에서 먼저 시행됩니다.(1608) 이 법은 특산물을 구하기 어려운 서민들을 위해 특산물의 가격이 변동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백겸, 이원의 주장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농토의 결 수에 따라 1 결당 12두를 내게 합니다. 쌀로 납부하게 되어 백성들의 부담 또한 줄어들었고, 세금 납부가 편리해졌습니다. 이는 국가 재정의 안정으로 이어졌으며 상업이 발달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무엇보다 국가 재정을 안정시키고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개혁 정책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1-4. 폐모살제:

  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인다는 의미입니다. (광해군과 인목대비의 악연)

계축옥사, 또는 칠서의 옥이라고도 합니다.-일곱 서자의 역모를 시도하고, 영창 대군 사사(죽음), 인목대비 (영창대군 어머니)가 유폐됩니다. 이러한 폐모살제는 당시 사회상으로 봤을 때 유교적 윤리관을 중시하던 조선사회에서 큰 비난을 받았습니다. 인조반정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광해군은 왕위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인목왕후는 복위되고, 대왕대비의 칭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1-5. 업적:

 5대 사고를 정비하고, 동의보감을 편찬합니다.(허준, 세계기록 문화유산), 동국지리지, 지봉유설, 경희궁(경덕궁)을 건립합니다. 그리고 왜란 때 소실된 창덕궁을 중건합니다.

 

2. 인조(1623~1649): 서인이 집권

2-1. 배경:

1623년 가도 주둔 사건: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 차지한 요동을 공격하기 위해 가도에 주둔한 사건을 말합니다. → 후금을 자극하는 계기가 됩니다.

1624년에는 이괄의 난이 일어납니다. 

인조반정의 논공행상에 대해서 불만을 품은 이괄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무고를 당하자 난을 일으키게 됩니다. 서인 내부에서 반란으로서는 처음으로 왕을 동성으로부터 피난시킵니다. 그리고 이후 길마재 전투에서 패배하여 진압됩니다.  이는 잔당들이 후금과 내통하게 되는 자리를 마련하게 됩니다. 

1627년을 배경으로 정묘호란이 발생합니다.

 후금이 황주에 침입하으려 광해군을 위하여 보복한다는 정봉수(용골산성 철산), 이립등이 의병을 일으켜 후금에 대해 대항하게 됩니다. 

2-1. 결과:

후금과 정묘약조를 체결하게 됩니다. 이는 형제 관계에 체결된다는 최명길의 수락에 해당됩니다. 

그에 따라 후금에 조공을 바치게 됩니다. 중강 및 회령 개시 허용 즉 공무역을 허용합니다.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 유지를 약속받며,

 

◆ 후금의 '청' 건국(1636):

 형제관계에서→ 군신관계로 격상을 요구 + 명나라 정벌을 위한 군량미와 병선을 요구합니다.

군신관계 요구에 있어서 조정에서는 주화론(수용)과 주전론(거절)으로 대립하게 됩니다.

군신관계를 받아들이자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이는 최명길(주화론주장)이며(외교적 해결을 추구), 주전론을 주장하는 김상헌, 윤집, 오달제, 홍익 한(삼학사) 등은 군신 관계를 거절합니다. (전쟁을 주장합니다.)  주화론과 주전론의 대립관계에서 주전론이 채택되어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납니다.

2-2. 병자호란(1636):

척화주전론이 우세해지자 청이 조선을 침입하게 됩니다. 이때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가서 저항하게 됩니다. 그 결과 청과 군신관계를 체결하게 됩니다. 청나라의 침략에 직면한 조선은 화친과 항전 사이에 갈등하게 됩니다. 그러나 강화도가 함락되고 남한산성이 포위되자 더 이상 지키지 못하고 삼전도에서 항복하게 됩니다. 1637년 병자호란 당시 인조(조선의 왕)가 청나라 태종에게 삼전도에서 머리를 삼세번 조아렸다 하여 삼전도의 굴욕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삼전도의 굴욕은 조선 왕조 역사상 가장 큰 치욕으로 치부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두 왕자 소현세자와 봉림 대군, 척화론자들(3 학사-윤집, 오달제, 홍익 한 등)이 볼모로 청에 압송되었습니다.

2-3. 설치:

두 차례의 호란을 겪으며 인조 때 어영청, 총융청, 수어청이 설치되게 됩니다. 명이 멸망하자 서인 송시열의 "숭명대의론", 대보단(숙종 때) 설치됩니다.

2-4. 결과:

 호란을 겪으면서 조선은 서북지역이 황폐화가 되며, 청에 대한 적개심과 문화적 우월감으로 북벌론이 제기됩니다.  이는 서인의 정권유지로 이용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영정법이 시행되게 되며(인조 13,1635), 대동법도 확대(강원도)되었습니다. 상평통보가 주조되고, 중강개시와 북관쌍시(회령 및 경원개시)가 개설됩니다. 

3. 효종(1649~1659): 서인 집권

효종 때 북벌론이 대두됩니다. 효종은 봉림대군 즉 둘째 아들입니다. 북벌추진은 효종의 실질적 북벌론과 서인의 북벌론으로 나뉩니다. 효종의 북벌 추친으로는 어영청, 총융청, 수어청등 군사력 강화를 위해 설치됩니다. 남한산성을 복구하고, 벨테브레(귀화인)를 훈련도감에 배치하여 신식 무기 제조(조총, 정권화포 등)등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서인들을 등용하며 서인(송시열, 송준길)의 북벌은 형식적으로만 주장하며 북벌을 정권 유지 수단으로 이용합니다.(명에 대한 의리, 치욕 설욕 명분), 군사적 기반이 되기도 합니다. 북벌은 실패로 돌아갑니다.(서인 정권 유지. 강화)  나선 정벌은 형식적 북벌의 실체입니다. 청 요청으로 러시아 원정 간다 하여 나선정벌이라 하였습니다. 효종 때 러시아가 남하하여 청과 조선을 자극하게 됩니다. 이에 조선에 청의 원병 요청이 있었으며 청에 조총 부대를 파견하게 됩니다. 1차 파병으로(1654): 병급이 2차 파병(1658): 신유가 파병됩니다. 대동법도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충청도, 전라도-김육), 시헌력(역법, 김육, 1644), 속오군을 강화(영장 파견)합니다. 이때 농가집성이 만들어집니다. (신속, 이앙법 보급) 농가집성은 농사직설에 금양잡록 구황촬요등 집대성하였습니다. 

4. 현종

현종 때 기해예송(1659)과 갑인예송(1674)이 발생합니다.

4-1. 기해예송(1659):

 효종이 사망하자, 자의대비 (효종 새엄마) 상복 기간 문제를 놓고 일어난 분쟁을 말합니다.

서인 송시열, 송준길을 주축으로 신권중심 우선이며 1년 상복을 주장합니다. (기년복, 주자가례, 왕사동례) 반면 남인 윤휴, 허적, 허목을 주축으로 왕권중시로 3년 상복을 주장합니다. (3년복, 주례, 국조오례의, 왕자례부동사서) 서인이 승리하며 1년복을 결정하며, 신권이 강화되는 계기가 됩니다. 

 

4-2. 갑인예송(1674):

효종 비가 사망하자, 자의대비 상복 기간 문제를 놓고 일어난 분쟁입니다.

서인은 9개월을 주장하고 남인은 1년을 주장합니다. 이번에는 남인이 승리하며, 1년복이 결정됩니다. 왕권 강화 주장이 승리하게 됩니다. 남인 집권 후 분열이 일어납니다.

5. 숙종

환국이 발생합니다.(편당적인 인사정책) 여자 3인(인현왕후, 장희빈, 숙빈최 씨), 명목상 탕평론 실제로는 편당적 인사정책이며, 윤휴에 의해서 호포법 시행이 주장됩니다.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 무고의 옥(신사환국), 병신환국, 정유독대등 조정이 환국으로 분란했습니다.